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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JamieLP
2018. 12. 15. 07:35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1878-1927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러시아 화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Troitse-Sergiyeva Larva 앞에서의 자화상. 1912 (우피지 소장)
상인의 아내. 1918. 쿠스토디에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나는 쿠스토디에프에게 큰 기대를 갖고있다. 그는 재능이 있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려깊고 진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을 주의깊게 배우고 있다..."고 레핀은 평했다. 레핀이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 대작을 주문받았을 때 그는 쿠스토디에프를 조수로 고용했다. 그 그림은 극도로 복잡하고 힘든 것이었다. 젊은 제자는 초상화 습작을 했고, 대작의 오른쪽 구석을 맡아 그렸다. 동시에 이 시기에 쿠스토디에프는 자신의 정신적 동료인 예술가들(이반 빌리빔, 몰도브체프, 마테 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는 인간정신의 복잡한 면을 투시하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1903년 쥴리아 프로쉰샤카와 결혼했다. 1904년에 장학금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했고 1907-9년에는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며 인물화와 쟝르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우리의 축복받은 러시아 땅"에 있어서 고국으로 기쁘게 돌아왔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고 쿠스토디에프의 정신에 선명한 반응을 남겼다. 이 당시 그는 "예술의 세계"라는 개혁적 운동의 미술가들을 만나 1910년에 합류하고 함께 전시했다.
1905년 쿠스토디에프는 책의 삽화에 관심을 갖고 고골,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학을 포함해 일생 그 작업을 했다. 1909년 그는 황립예술학교의 회원으로 뽑혔다. 열심히 활동하던 중, 결핵 발병(척추)으로 스위스에서 1년 요양했다. 1916년 하반신 마비가 되어 그는 "이제 나의 전 세계는 내 방이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그는 명랑하고 생기있어 주변인들을 놀래켰다 한다. 그의 화려하고 즐거운 그림들에서 그가 경험했을 고통은 보이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한 삶의 모습만 보인다.(아래의 세 그림이 당시 그려짐.)
팬케잌 화요일. 1916
쇼 부스 Show booths. 1916-20
그라보우스카 백작부인. 1917
1923년 쿠스토디에프는 혁명 러시아의 예술가연맹에 가입했다. 1927년 결핵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작업은 활발했다(49세).
겨울 축제. 1919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러시아 화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Troitse-Sergiyeva Larva 앞에서의 자화상. 1912 (우피지 소장)
상인의 아내. 1918. 쿠스토디에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나는 쿠스토디에프에게 큰 기대를 갖고있다. 그는 재능이 있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려깊고 진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을 주의깊게 배우고 있다..."고 레핀은 평했다. 레핀이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 대작을 주문받았을 때 그는 쿠스토디에프를 조수로 고용했다. 그 그림은 극도로 복잡하고 힘든 것이었다. 젊은 제자는 초상화 습작을 했고, 대작의 오른쪽 구석을 맡아 그렸다. 동시에 이 시기에 쿠스토디에프는 자신의 정신적 동료인 예술가들(이반 빌리빔, 몰도브체프, 마테 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는 인간정신의 복잡한 면을 투시하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1903년 쥴리아 프로쉰샤카와 결혼했다. 1904년에 장학금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했고 1907-9년에는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며 인물화와 쟝르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우리의 축복받은 러시아 땅"에 있어서 고국으로 기쁘게 돌아왔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고 쿠스토디에프의 정신에 선명한 반응을 남겼다. 이 당시 그는 "예술의 세계"라는 개혁적 운동의 미술가들을 만나 1910년에 합류하고 함께 전시했다.
1905년 쿠스토디에프는 책의 삽화에 관심을 갖고 고골,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학을 포함해 일생 그 작업을 했다. 1909년 그는 황립예술학교의 회원으로 뽑혔다. 열심히 활동하던 중, 결핵 발병(척추)으로 스위스에서 1년 요양했다. 1916년 하반신 마비가 되어 그는 "이제 나의 전 세계는 내 방이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그는 명랑하고 생기있어 주변인들을 놀래켰다 한다. 그의 화려하고 즐거운 그림들에서 그가 경험했을 고통은 보이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한 삶의 모습만 보인다.(아래의 세 그림이 당시 그려짐.)
팬케잌 화요일. 1916
쇼 부스 Show booths. 1916-20
그라보우스카 백작부인. 1917
1923년 쿠스토디에프는 혁명 러시아의 예술가연맹에 가입했다. 1927년 결핵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작업은 활발했다(49세).
겨울 축제.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