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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표도르 바실리예프
    카테고리 없음 2018. 12. 15. 02:22
    <Fyodor Alexandrovich Vasilyev: 표도르 바실리예프: 1850–1873>

    ▪러시아의 풍경화가로 러시아 미술에 서정적 풍경을 소개했다.

    자화상.  1873(사망하던 해)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 4년후 부모가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사생아로 여겨졌다 한다.  바실리예프는 12살부터 우편배달, 사본 필사, 미술품 재생의 일로 돈을 벌었고,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을 부양했다.

    1863년(13세때) 바실리예프는 미술학교의 야간학생으로 다니며, 그를 돌봐준 여러 화가를 만났다.  1866년 유명한 풍경화가 쉬시킨이 그의 누나와 사랑에 빠졌고, 틈틈이 바실리예프에게 풍경화를 가르쳤고, 후에는 크람스코이, 트레치코프 등에게 소개도 해주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자신의 그림과 강한 경쟁상대가 되자 쉬쉬킨은 집행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상을 받도록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폭풍우 전.  1868

    폭풍우 전.  1868


    바실리예프의 "폭풍 후(1868)"같은 초기 그림에서는 바르비종학파의 영향이 보이지만 모티프를 빌린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바르비종파보다 실력이 부족했지만 점차 자신의 스타일을 확보하여(비온 후.  1869), 곧 바르비종학파를 넘는 표현력과 민족적 색채를 보인다고 비평가들은 평가한다.  1870년 그는 일리야 레핀과 볼가강을 여행하고 그때 그린 "예인선(1870)"은 큰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이동파의 초기 멤버 20명중의 하나가 된다.

    볼가강 예인선.  1870

    셍페테르부르그의 조명.  1869

    구름.  1860년대

    비온 후.  1867

    비온 후.  1867

    나무 꼭대기.  1867

    셍페테르부르그의 새벽

    길가의 통나무.  1867-9

    폭우가 내린 후.  1870

    볼가강 Lakuna.  1870-71

    해빙.  1871

    바실리예프의 "해빙"은 발표되자마자 그를 유명하게 했다.  황실(알렉산더 왕자 즉 미래의 알렉산더 3세)가 카피 한 점을 주문했고,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는 그에게 일등상을 수여했다.  이 그림은 1872년 런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황립예술학교의 인턴이 되었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천재소년" (바실리예프가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 불렸던)에겐 그 인기를 즐길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셍페테르부르그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미아로 이주했던 바실리예프를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가 계속 후원했으나, 그는 그림으로 비용을 갚아야했다.

    습한 초원.  1872


    바실리예프는 새 풍경에 익숙해질 수 없었기에, 그는 계속 러시아의 풍경을 기억이나 옛 스케치에 의존해서 또는 상상으로 그렸다.  이때의 예가 1872년의 "습한 초원"이다.  그후 크리미아의 풍경에 매료되며 그린 그림이 "크리미아의 산"(1873--맨 아래 그림)이다.

    바실리예프는 23세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셍페테르부르그에서 열린 추모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전작품은 사전에 예매되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의 다음 세대 풍경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이 게는 "바실리예프가 우리를 위해 '하늘'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미술사가들은 바실리예프가 이사크 리비탄, 발렌틴 세로프,빅토르 보리스-무사토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글과 그림 출처.  Wiki)

    황혼의 연못.  1871

    호숫가의 롬바르디 포플라. 저녁. 

    숲속 늪지.  1872

    크리미아의 산에서.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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